서울 도심 대각사에서 대각교(大覺敎)운동 전개하다.
대각교 운동은 용성진종 조사가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운동이었다. 그는 불교의 기본사상을 바탕에 두고 새로운 이미지의 불교운동을 모색하여 1921년 4월 대각교를 창립하면서 대각교 운동을 전개했다. 대각교는 용성진종 조사에 의하여 20세기 초반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불타 조사원류에 입각한 개혁을 표방하고 출발한, 불교의 대중화(大衆化)ㆍ생활화(生活化)ㆍ지성화(知性化)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각교 창립의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불교의식에 판소리, 민요, 민속무용 등의 민중 문화를 접목시켜 민중이 불교신앙의 주체가 되게 함으로써, 독립운동, 불교개혁운동, 민중운동을 실현하려는 데에 있다. 이는 민족의 독립 없이는 불교의 진리성을 구현 하고자 하는 대각교 운동이 불가능하였음을 뜻한다. 대각교 운동은 사회개혁과 민족 정기 승화에 연결되어 한국사회에 역사적 전환을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이 같은 사상은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의 독립선언문에도 반영되어 있어 그 의의를 더한다.
일제의 대각교 탄압에도 굴하지않고 지속적인 활동을 펼치다.
일제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고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과 사상을 일본식 불교로 만들기 위해 승려에게 대처식육(帶妻食肉)과 음주솔가(飮酒率家)를 암암리에 조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에 맞서 1925년에 만일참선결사회(萬日參禪結社會)를 결성하여 불교의 왜색화와 타락에 대응하고 순수한 전통을 이어가게 했으며 1926년 5월에는 범계생활금지(犯戒生活禁止)에 대한 제1차 건백서(建白書)를 127명의 비구 명의로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고, 9월에 다시 지계건백서를 제출하여 조선 총독부의 불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불교계의 정화운동을 전개 함으로서 전통 불교의 맥을 잇도록 했다. 그 1차 건백서의 첫머리는 이렇다. “석가 세존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래로 불자와 대중이 각각 법륜을 굴려서 삼천년이 가깝도록 비구가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데 요즈음 파렴치한 마구니 권속의 무리가 마음을 오욕에 물들이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멸하여 감히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는 짓을 행하며 청정사원을 마귀의 소굴로 변화시켜 참선, 간경, 염불 등을 모조리 없애 버리니 모든 하늘 신들이 눈물을 흘리고 자신들로 하여금 노여움을 말하게 한다(생략).” 1934년 일제는 대각교 재산을 몰수. 신탁하여 대각교 활동을 억제하기 시작하고 1938년에는 18년 동안 활기차게 활동을 펼친 대각교를 강제 해산 시켰다. 그러나 용성조사는 이러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대각교당을 “조선불교선종총림”으로 개편하여 활동을 지속했다.
빼앗긴 말과 글을 찾고 불경의 대중화를 위해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다.
수감중에도 어떤 방법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실현하며 그를 통해 어떻게 중생구제와 민족 독립의 힘을 쌓아갈까 고심해온 용성진종 조사는 1921년 58세 되던 해에 출옥 하자 마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고 한문으로 되어 있는 불교경전의 한글화에 착수한다. 난해한 경전에 갇혀 있던 당시의 불교계를 생각 할 때 그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한문 경전에 단순히 토만 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까지도 상세히 설명해 두었다. 이때부터 원각경을 비롯한 금강경, 능엄경 등 어렵기만 했던 불경 20여종을 번역하고, 박헌영스님과 함께 불교잡지 ‘불일(佛日)’을 간행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천한 언문으로 불경을 더럽힌다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산간에서 거리로, 불교 스스로가 대중에게로 다가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이고 한문으로 된 불경을 쉬운 한글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교진리에 쉽게 접근하고 나아가 그 속에서 민족의 우수성과 호국불교의 전통을 일깨워 민족의 자주독립 역량을 키웠다. 용성조사는 마음을 담는 수행의 기본인 「수심론」을 비롯해 20여종의 어록을 저술하였다.
화과원(華果園)을 설립하여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실천하다
함양군 백전면 백운리 백운산자락에 임야 30여ha와 주변의 전답을 구입하여, 1927년 용성진종 조사의 나이 64세 되던 해에 화과원을 설립 하였다. 과수(果樹) 수만 주를 심고 ‘일하면서 참선하고, 참선하면서 일을 하는 선농불교’를 일으켜 조선불교 참선수행(慘禪修行)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아래 힘겨운 사원경제를 극복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경제력을 향상시킴 으로써 민족경제를 회복하는 역량을 기르고자 함이고, 동시에 참선수행 오도(悟道)후의 보림수행을 선농불교(禪農佛敎)를 통해 타력생활 (他力生活)에서 자력생활(自力生活)로 돌리는 데 솔선수범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화과원에서 수행하는 수도승(修道僧)의 안목(眼目) 은 생사일여(生死一如)이기 때문에 전국 불교계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일단 함양 화과원에 모아져서 이곳을 거점으로 상해와 용정 등지에 지원 하는 중요한 거점기지로 활용됐다. 화과원은 2000년 8월 3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 229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불교음악의 새로운 역사를 열다.
1927년 64세에는 「대각교 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찬불가인 왕생가(往生家), 권세가(權勢家) 등 국악조의 창작찬불가(創作讚佛歌)를 작시, 작곡하였다. 용성진종 조사에 의하여 창작된 찬불가는 한국 불교음악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大覺寺)에 대각 일요학교를 개설하여 청소년 교화에 힘쓰면서 오르간을 손수 치기도 하고,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과 제사 등을 지내기도 했다. 용성진종 조사는 찬불가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국악조의 창작국악으로 된 창작 찬불가를 남기는 등 불교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한국 전통음악의 권위자인 박범훈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용성 조사를 우리나라 서양음악의 작시, 작곡의 초조라고 밝힌 바가 있다. 1998. 4월에는 “부처님 오신날 기념 용성음악제”를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교수이자 국립 국악관현악단장 겸 예술감독인 박범훈 교수의 지휘 아래 국립중앙극장 대극장에서 한국불교음악의 첫 개척자이신 백용성 조사의 일생을 기리는 성대한 음악회가 열린바 있다.
입적하시면서 유훈 10사목(十事目)을 남기다.
용성진종 조사는 일생을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시며 조국 독립과 불교중흥을 염원하였으나 그 빛을 보지 못한채 1940.2.24 세수77세,법랍 61세로 대각사에서 입적하셨다. 입적하시면서 수법제자인 동헌완규(東軒完圭)스님에게 당신이 생전에 미처하지 못한 부분을 실현하도록 당부하는 유훈을 남기셨다. 유훈내용은 “가야불교 초전 법륜성지를 잘 가꾸어라”등 10가지로서 그 뒤 수법제자인 동헌완규 큰스님과 손상좌인 불심도문 큰스님이 중심이 되어 국내외 불교 성지 가꾸기등 용성 조사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실현해 가고 있다.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 내시다.
치열하게 정진했던 용성조사는 후학 육성에도 힘써 훌륭한 제자를 많이 길러 내셨다. 동사(東山),동암(東庵),동헌(東軒),인곡(仁谷),운암 (雲庵),혜암(慧庵),소천(韶天),고암(古庵), 자운(慈雲)스님등 “용성문하 구제(九弟)”라 불리는 제자를 두었는데 모두가 한국 불교의 중흥을 이룬 선지식 들이다. 대를 이어 조사님의 선풍을 이어 받은 후학들은 불교계의 거목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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